본문 바로가기
축구 + 피파

레전드 - PSG와 챔스 4강 1차전을 앞둔 맨시티 주장 페르난지뉴 인터뷰

by 뱀선생 2021. 4. 30.
반응형

레전드 - PSG와 챔스 4강 1차전을 앞둔 맨시티 주장 페르난지뉴 인터뷰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페르난지뉴 3명이 있다면 우승이 가능하다고 극찬한 선수 페르난지뉴.

지뉴옹 예전 만치니 감독 시절 말년병장 야야투레 밑에서 개같이 뛰어다녔던거 생각남 ㅜ

 

 

언젠가 기자가 물었다. “승리하는 거 이젠 지겹지 않으세요?”

 

음, 내 대답은 ‘아니오’ 다. 완전 정반대.

 

내 말은, 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모든 우승컵이 각각 특별하고, 승리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이런 정신 상태, 그러니까 다음 경기 승리만을 위해 극도로 집중하는 이런 상태에 접어들면... 어쩌면 굉장히 이상한 비유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허리케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폭풍에 뒤흔들리는 가운데서도, 허리케인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이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주변의 소음과 비바람을 차단할 수 있다.

 

그땐, 승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Vamos! 좋아, 오늘은 이겼고, 근데 이젠 다음 경기, 다음 도전을 준비해야지. 뒤를 돌아볼 시간은 없다. 축하할 시간은, 정말로 없고.

 

모든 운동선수들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틀에 박힌 표현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가장 높은 수준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마음가짐은 필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허리케인 속에 있어 왔다. 처음 유럽에 도착한 이후 15년째다. 15년!

 

이제는 내게도 약간이나마 내 과거를 돌아볼 권리가 생긴 것 아닐까?

 

지금껏 있었던 일을 설명드리겠다.

 

 


 

나는 연설을 즐기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닌데, 몇 달 전에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2월 31일이었다. 새해 전날.

 

우리는 프리미어리그 순위표의 8위에 위치해 있었다.

 

펩 감독님은 아주 화가 나 있었고.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2020-21시즌의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물론, 시즌 시작은 모두에게 완전히 엉망이었다. 3개월 동안 축구 없는 삶을 살다가 시즌 재개와 함께 돌아와야 했고, 그 후엔 제대로 된 프리시즌을 사실상 갖지 못했다. 우리 모두 선수 경력 내내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여러분은 지금쯤 내가 얼마나 많은 코로나 검사를 했는지 모를 거다. 내 코는 원래도 컸단 말이다. 지금 어떨지 상상해봐라! 하하!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다.

 

전염병과 시즌 재개 이후, 선수들의 모든 일상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훈련과 관련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했던 사소한 일들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식단, 회복, 사교 활동과 관련된 간단하고, 당연한 일들도.

 

현실이 통째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적응해야만 했다. 정말 힘든 일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맨체스터 시티가 어떤 고난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힘든 시기에도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팀을 이끌어주는 건 우리의 정신적인 강인함이라고 믿는다.

 

그것 덕분에 우리는 최고가 될 수 있었다. 과거에 우리를 챔피언으로 만들어 준 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20년의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는 8위였고, 그날도 훈련이 있었다.

 

결코 좋은 분위기의 훈련은 아니었다.

 

일부 선수들의 마음가짐, 바디 랭귀지, 노력 상태가 어땠는지, 뻔히 보였다. 여러분도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알지 않는가? 패스는 빗나가고, 선수들은 공을 뒤쫓지도, 달리지도 않고, 열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건 우리가 아니었다. 2년 연속으로 리그를 우승한 팀도, 리그 승점 기록을 갈아치운 팀도 아니었다.

 

그날 훈련이 끝나고, 펩 감독님이 주장이자 구단의 리더인 나를 불러 말했다. 아주 직설적인 말이었다. 감독님은 모든 선수들이 100%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팀에서는, 훈련에서 언제나 100%를 다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그냥 집에 가는 것이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대화도, 타협도 없다.

 

감독님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는 그 기준을 유지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시켰다.

 

다비드 실바가 팀을 떠난 후, 시즌이 시작할 때 나는 주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말 명예로운 일이다. 모든 선수단과 스탭진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 알고 있었나? 펩 감독님만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잉글랜드에서 주장의 역할이란 다른 나라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 그것과는 꽤 다르다. 이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새로운 의무가 많다. 일정과 규칙 준수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다. 여러분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나는 물리치료 시간에 핸드폰을 하는 선수들에게 벌금을 부과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맨시티 같은 클럽에서 주장을 맡는다는 건 아주 멋지고 명예로운 일이다. 맨시티에선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기준들이 아주 높고, 나 역시 그 어느 것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그날 훈련이 끝나고, 퇴근 후 집에 가서 가족들과 새해를 축하하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펩 감독님과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새해 전날 밤 가족들과 폭죽 행사를 보고 있을 때조차 나는 맨체스터 시티 주장으로서의 내 임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2021년 1월 1일 아침 7시에, 나는 구단 관계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수단 회의를 소집해주세요. 할 말이 있습니다.”

 

훈련이 시작하기 전에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감독님한테 오늘 훈련은 조금 늦게 시작하자고 말씀드려라.”라고 말했다.

 

비상사태였으니까.

 

모든 선수가 도착한 후, 나는 선수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주장으로서 말이다.

 

나는 감독님이 내게 말한 것들을, 어떤 일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선수들에게 전달했다. 훈련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나중에 실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했다.

 

아주 솔직하고 기탄없는 연설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다른 선수들도 각각 자기 생각을 말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고 모두가 그것을 들어야만 했다.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오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번 시즌의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혹은 우승 기회가 날아가는 걸 수동적으로 지켜만 볼 수도 있었다.

 

다음 경기는 첼시 원정이었고, 당시 첼시는 리그에서 순항 중이었다. 경기 전 나는 생각했다. “이 자식들 이번 경기에도 열심히 뛰지 않으면, 됐다! 나도 포기한다!” 사기를 완전히 잃어버릴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물론, 우리가 이겼다. 아주 좋은 경기력으로. 전반전에 우리는 이미 3-0으로 앞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린 너무 열심히 뛰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날 경기 이후로 우리는 놀라운 연승 기록을 이어나갔으니까.

 

우리는 다시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왔다.

 







맨시티가 나의 위닝 멘털리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잉글랜드에 오기 전에 이미 그걸 갖추고 있었다.

 

나는 완벽한 기술을 갖춘, 정교한 선수는 아니지만, 결코 전투에서 물러선 적은 없다. 내 동료들과 코치들, 팬들은 내게 의지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언제나 내 피를 내줄 각오로 경기에 임할 것이다. 언제나.

 

훨씬 전에 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브라질을 떠나 샤흐타르 도네츠크로 이적할 수 있는 제안을 받았던 것은 겨우 20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유럽 축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하는 화폐가 뭔지도 몰랐다. 지도에서 우크라이나를 찾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내게 유럽은 그저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가 엄청 많은 땅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에서 잘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바깥 세계 경험은 거의 없는 론드리나 출신 꼬맹이일 뿐이었다.

 

언젠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경기를 치르기 위해 콜롬비아로 갔을 때가 떠오른다. 구단에서 매일 일당 30달러씩을 더 얹어줬다. 미국 달러 말이다! 우리에겐 엄청 큰 돈이었다.

 

내 친구 알란 바히아와 나는 엄청 신나서 호텔 침대 위에 지폐로 우리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친구 알란은 이름이 짧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름이 길어서 결국 남은 몇 장의 브라질 헤알 지폐로 완성해야 했다! 하하!

 

어쨌든 샤흐타르의 제안이 왔을 때, 이건 축구선수로서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물론, 금전적 측면도 있었다.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입장에서는, 나를 팔고 받은 돈으로 훈련 시설을 개선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내 침대에 우리 가족들 이름 전부를 쓸 수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처음 한 달이 끝나갈 무렵, 그때까지도 나는 은행 계좌가 없었고 구단은 실제로 내 출장 수당을 현금으로 줬다. 엄청 큰 현찰 다발이었다. 30달러가 많다고 생각했던 소년에게, 이건 미친 수준이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호텔에 머물고 있었고 이 돈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나는 아내에게 돈다발을 보여줬고 결국 아내가 돈을 수건에 감싸서 압력밥솥 안에 숨겨두었다! “여기다 넣어두면, 아무도 건들지 못하겠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압력밥솥이 뭔지도 모를걸요!” 하하!

 

첫 급료와 계약금으로, 쿠리치바의 어머니께 아파트도 한 채 사드렸다. 내 옛 팀 동료들과 비교해서 나는 아주 조심스러운 편이었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돈을 떠나서, 우크라이나에서 보낸 8년은 정말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러시아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사귄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아들도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고, 그러니 나는 언제나 일정 부분 우크라이나인일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내가 이 나라와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지... 그런데 진짜...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진짜 너무 추웠다!

 

브라질에서 내가 살던 곳은, 가장 추운 시기에도 기온이 섭씨 15도 이하로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도네츠크에서 겨울이 처음 닥쳤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을 상상해보라. 그 전까지 나는 눈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휴식기에서 돌아온 직후에 맞은 그해의 1월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해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다.

 

영하 26, 27도를 말하는 것이다. 진짜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차로 달려가서, 훈련장에 갔다가, 훈련하고, 다시 차로 달려와서 집에 오는 것뿐이었다. 밖을 걸어 다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결국 적응하게 된다.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그 도전이 즐거웠다.

 

축구 역시도 마찬가지다. 브라질에서 익숙했던 것에 비해 더 빠르고, 역동적이었으며, 훨씬 더 많이 뛰어야 했다. 그것에도 적응해야만 했다. 팀 동료들과 코치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선수로서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보상을 받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을 즐겨 왔다. 해묵은 습관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에 스며들어야 하는 걸 좋아한다. 진심으로 배우고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 과정이 끝나면 결국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도 발전할 수 있다.

 

내가 우승컵들을 들어 올리는 순간에, 그 순간에 다다르기까지의 수많은 난관, 적응 과정, 부상, 얼굴에 눈을 맞으며 훈련하던 날의 사소한 기억들이 그 성공의 순간을 더욱 달콤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과정을 다시 할 수 있다.

 

8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우승을 자주 경험했지만, 내 최고의 기억은 ─ 의심의 여지 없이 ─ 2009년의 UEFA 컵 우승이었다.

 

샤흐타르 도네츠크 구단, 그리고 특히 구단주는 수년 동안 재능 있는 브라질 선수들에 대한 투자를 계속해왔었고 샤흐타르를 유럽의 명문 구단 반열로 끌어올리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진행해왔다. 그 결실을 보는 데 필요한 것이 대륙 대회 우승컵이었다.

 

구단에서 4번째 시즌에 결국 UEFA 컵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우리는 대륙 대회에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통한의 패배와 탈락이 뒤따랐다. 2007년 세비야에게 탈락했던 때가 기억난다. 추가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상대 골키퍼가 득점했다. 내 말은, 이건 좀 아니잖아!

 

이런 패배를 겪으면 다 포기하고 싶어지지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 스스로 충분한 실력과 의지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2009년 5월 20일, 이스탄불에서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마침내 우리가 우승했다.

 

구단에도 정말 뜻깊은 순간이었다. 우리 모두가 공유했던 목표가 드디어 달성된 것이다.

 

우리 브라질인들은 ─ 우리 중 5명이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다 ─ 구단이 추진한 프로젝트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요새는 브라질에서 샤흐타르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다. 우리가 사람들이 샤흐타르를 지도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도운 셈이고, 그건 꽤 특별한 일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결코 기준을 낮추지 않는 마음가짐, 그게 나를 맨시티로 이끌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하는 리그이지만, 나는 맨시티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프리미어리그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챔피언스리그에는 열광했었지만 다른 국내 리그들에 관심을 가질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적한 이유는 이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자, 흥분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내 선수 경력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리는 아주 좋은 팀이었지만 국내 리그에서는 우리가 워낙 압도적이었고, 언론이나 팬들로부터의 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리그에서 한 수 위였다.

 

잔잔한 수면 위를 항해하는 느낌이었다면, 프리미어리그는 끊임없이 몰아닥치는 폭풍우와도 같다.

 

모든 팀들이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리그 자체도 아주 광란의 상태이다. 일주일에 3경기를 치르는 때도 있는데, 매 경기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매 경기에 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며 모든 경기를 이겨야 한다!

 

잉글랜드에서 내 삶과 마음가짐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바로 펩 감독님이다.

 

우리는 6년 동안 함께 일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배웠다. 분명히 감독님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다. 혁명 그 자체랄까.

 

 

감독님이 매우 지적이고 꼼꼼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그는 선수들을 아주 잘 지도한다. 자기 분야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는 서툴러서 학생들이 배우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선생들도 가끔 있지 않은가? 펩 감독님은 기술적인 것이든, 전술적인 것이든, 뭐가 됐든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모두가 자동으로 그의 말을 이해한다 ─ 심지어 감독님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데도!

 

감독님의 집무실 문은 항상 열려있고 선수들은 감독님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감독님이 위대한 이유는 언제나 선수들에게 100%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기장 위에서든, 회의에서든, 어디에서나 말이다.

 

감독님은 내게 새해 전날의 그 훈련 수준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팀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을 책임이 주장인 내게 있다는 걸 분명히 했다.

 

우리는 최근 몇 년 동안 이 구단에서 놀라운 업적들을 달성했다. 역사적인 일들 말이다.

 

우리는 기록들을 세워나갔다.

 

우리는 2시즌 동안 승점 198점을 기록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Centurion*이라고 부르는 걸 아는가?

(*역자 주 ─ 원래 뜻은 로마 군대의 100인 대장. 라틴어의 centurio에서 나왔으며, 영단어 century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centurio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숫자 100 자체를 상징하기도 함. 여기서는 프리미어리그 최초로 승점 100점을 넘긴 맨시티를 기념하기 위해 팬들이 붙여준 별명.)

 

지난 시즌의 리버풀조차 그 기록을 넘지 못했다!

 

수년 동안 경기장 위에서와 밖에서 우리가 쏟은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 놀라운 2017-18시즌과 2018-19시즌에 맨체스터 시티의 일원으로 함께한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 그 시기에 우리가 달성한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기는 하는 거냐고 말이다.

 

솔직히, 우리가 이뤄낸 걸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어쩌면 은퇴한 이후에 과거를 돌아볼 때나 이해할 수 있을지도. 어쩌면 또 한 번의 15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언젠가는, 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 혹은 손주들과도 ─ 이 대륙에서 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을 회상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날, 맛있는 새우 요리로 배를 채우고, 코코넛 워터로 목을 축인 후,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아이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겨울.

 

압력밥솥.

 

그날의 훈련.

 

우승컵들.

 

와우, 정말 달콤한 순간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았으니까.

 

 

 

지뉴옹...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크라이나는 영하 20도에도 훈련하는구나 ㅅㅂㅋㅋ

 

진첸코가 팀에 적응하는데 도움많이 됐겠다 러시아어도 할줄알고 우크라이나도 어느정도 알고있었으니

 

EPL 및 빅리그의 젖줄 샤흐타르

 

해리케인: 무관 속의 삶

 

이거 틀어놓고 읽으면 잘읽힘

youtu.be/Xl9qBwwPISk

에릭베넷 허리케인 음악

 

시티팬들은 좋아죽을만한 선수네 부럽다

 

맨시티 레전드 페르난지뉴

 

틀지뉴 형님 1년만더 해줘요

 

지뉴옹...... 맨시티의 레전드입니다

 

챔스 우승하면 시나리오 완벽할텐데 ㅋ

 

하지만 맨시티 같은 클럽에서 주장을 맡는다는 건 아주 멋지고 명예로운 일이다. 

맨시티에선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기준들이 아주 높고, 나 역시 그 어느 것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지뉴형님... 팀 어려울때 선수단 회의도 열어주시고
콤주장님 이후로 좋은 주장을 연달아 볼수있어서 팬으로서 너무 행복하네요

 

진짜 야야투레랑 같이 뛰면서 수비 부담 다 짊어지다가 한번 실수하면 욕 먹고
야야투레는 그러고도 공포만 쌓으면 좋은 소리만 듣고 하는거보고 정이 많이 가던 선수였는데
펩 체제에서 실바-지뉴-덕배 중원라인이 돌아갈 수 있었던 핵심임을 증명하고
리더쉽 측면에서도 콤파니 빈 자리를 채워준 것 같아서
이젠 시티 팬이라면 아무도 부정 못할 레전드라고 생각함.
다만 아쉬운게 있다면 주요 경기에서 상대 핵심 선수에 대한 견제가 점점 심해지는 느낌..
이왕이면 시티 생활 마무리까지 더 깔끔하게 좋은 소리만 들었으면 좋았을텐데 그게 아쉬움

 

축구소년에서 곧떠나야할때 인생이 담겨있네요

 

맨시티는 위기때마다 고참 선수들이 역할을 잘 해주는듯

 

시티 팬으로서 가슴 찡하면서 읽었습니다. 

 

와 왜이리 멋있냐

 

펩시티 주장 페르난지뉴 일단 카라바오컵은 들었음 ㅋ

 

출처 : www.theplayerstribune.com/posts/fernandinho-soccer-manchester-city-premier-league

 

반응형

댓글